대구향교(大邱鄕校)는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남산동)에 있는 향교(鄕校)이다.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교동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었으며, 정종 2년(1400년)에 불타서 곧 재건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향교가 대구부 동쪽 2리에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宣祖) 32년(1599년) 달성공원 자리에 옮겨 재건하였다가 동왕 38년(1605년) 다시 교동으로 이건하였다. 조정과 사림이 추진한 오현종사(五賢從祀)에서 정인홍(鄭仁弘) 등이 오현에 든 인물 가운데 이황(李滉)이나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문묘 종사는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이 일었을 때, 선조 37년(1604년) 대구향교에서도 유생들이 모여 해당 문제를 논의하고 품정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모당집》). 인조(仁祖) 3년(1625년)에 향교의 명륜당을 중건하였다. 순조(純祖) 6년(1806년) 경상도관찰사가 된 윤광안(尹光顔)이 그 해 양월(10월)에 향교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했다는 기록이 칠곡의 유생 이동급(李東汲)의 문집 《만각재집》(晚覺齋集)에 남아있다. 1932년에 총독부에 의해 대성전과 동·서무, 명륜당 등 주요 건물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대성중학원(이듬해 대성중학교로 승격)을 설립하였고, 11월 7일 대구 지역의 한국민주당 · 국민당 · 조선공산당 · 조선인민당(결성준비위) 등 6개 정당이 대구향교에 모여 경북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이승만의 주창으로 이미 서울에서도 좌우 이념이나 정파를 넘어 결성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강령을 쫓아 이루어진 것으로, 3.1운동 당시 대구 출신의 기독교계 인사이자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과, 돈암장을 드나들며 이승만 등 우익 거물들과도 교분이 잦았던 이경희에 의해 특히 경북에서 일찍 결성되었다. 촉진회는 1) 독립 촉진을 위하여 민족의 총단결을 도(圖)함 2) 생산을 장려하여 민중생활의 안정을 기함 3) 계몽운동을 진기하여 민도 향상을 기함 4) 일본제국주의 잔재의 일소를 기함 등의 행동 강령을 도민들에게 주지시켰으며, 대구의 좌파세력 일부도 경북독립촉진회에 가담하였다.[1] 대성중학원은 이후 1947년에 대구대학교 설립을 인가받아 명륜당에 개설하였으며, 1948년에 대구중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이 해에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94호에 의거하여 재단법인 경상북도 향교재단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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