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중후반 흥선대원군이 조정을 통치하던 시기, 조선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서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인천 지역은 서양세력이 조선으로 드나드는 관문이자, 선교사들에게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외국과의 통상과 이질적 사상의 침투에 완고했던 조정은 외세와 함께 천주교 신자들을 조선 침략의 공범으로 내세워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인천 제물진두(祭物津頭)에서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의 증손자인 이연구와 이균구 등 열 명이 처형되었다. 1868년 4월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에 의해 일어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무덤 도굴사건과 잇따른 서양세력의 침공과 관련해 조선 정부는 천주교인들에게 책임을 물어 서양 배와 관련된 장소에서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진두(津頭), 곧 나루터에서 신자들을 공개 처형함으로써 서양세력의 배척하는 척사(斥邪) 의식을 고조하고 천주교를 금하는 경종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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