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2가에 있는 마을.
산복도로변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이다. 지금도 일본인 공동묘지의 비석 등이 계단, 담장의 부재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비석마을'이란 마을 이름에서 '비석'이 바로 묘비를 뜻한다. 이 때문에 도시괴담 등을 모아놓는 사이트에 관련 괴담이 자주 보인다. 묘비였던 돌을 주워와 다듬이질할 때 썼더니 "이타이, 이타이(아야, 아야)!" 하는 소리가 돌에서 들렸다는 얘기, 유골함이었던 단지를 항아리로 쓰려고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아츠이, 아츠이(뜨거워, 뜨거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거나 안에서 손이 나왔다거나, 세탁소 지하에서 밤중에 자는데 게다[2] 소리가 들리더라, 기모노를 입은 귀신을 봤다 등등.
부산의 역사를 좀 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네다. 일본인들이 광복 당시 공동묘지를 남겨두고 떠난 후 5년간 비어 있다가, 6.25 전쟁 당시 전국에서 온 피난민들로 부산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부산 중심부에 더 이상 집 지을 자리가 부족하여 피난민들이 영 꺼림직해도 궁여지책으로 비어있는 묘지 땅에 집을 짓고 마을을 꾸렸던 곳이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유족들이 갑작스럽게 조선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무덤을 이장할 겨를이 없었다.
비석마을의 골목을 따라 거닐면, 각진 모양의 상석이나 비석들은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쓰이거나 옹벽 또는 집의 주춧돌 등으로 활용된 모습이 보인다.
피란 오면서 여기에 터전을 잡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당장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지경이었기에 처음에 이곳에 올 때도, 그리고 지금도 무덤이든 비석이든 귀신이든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배고픔과 추위라서 누울 자리를 가릴 처지도 아니었고 귀신 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도 익숙해지니까 역시나 무서울 건 없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위에 산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거처를 내어준 데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들어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비석 앞에 수시로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 놓고 영혼을 위로해주며, 명절에도 제사(차례)를 같이 지내준다고 한다.
음력 7월 15일(백중)에는 인근 절에서 단체로 일본인 위령제를 지낸다. 아무리 적국 사람이었다고 해도 살아있는 일본인은 광복과 함께 모두 쫓겨나 여기 묻힌 사람들은 모두 제사도 끊겨버린[3]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었고, 지배층도 아니고 대부분 서민으로 힘들게 살다가[4] 죽었기 때문에 동병상련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귀국하지도 못하고 떠도는 망자들의 기구한 사연을 알고 있는 부산 향토사학자, 종교계 등 민간 차원에서 망자의 후손을 찾는 사업을 진행하다가, 2019년부터는 부산 서구청에서도 직접 비석 전수조사를 시작하였다.
출처:나무위키 |